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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밤의 강변북로는 유난히 미끄러웠다.
찌그러진 폐차 직전의 국산 경차 안에서 강도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입가에서 흘러나온 피가 낡은 스티어링 휠과 조수석의 데모 테이프, 악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사이드미러 너머로 거대한 덤프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이 멀도록 번쩍이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경차를 밀어 강변 아래로 떨구려고 따라붙은 트럭이었다.
지이잉—.
대시보드 위에 금이 간 휴대폰 화면에 [태율엔터 총괄전무 강태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도준이 부들부들 떨리는 피 묻은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폰 너머로 얼음장처럼 차갑고 오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수고했다, 도준아. 네가 지난 10년간 골방에서 써준 30곡 덕분에 내가 이번 ‘국내 음악프로듀서상 올해의 프로듀서상’을 받게 됐어.”
“강태진…… 개자식아…….”
도준이 핏물을 뱉고 이를 악물었다.
“화내지 마라. 첩년의 배에서 태어난 근본 없는 혼외자 놈을 거둬서 밥 먹여준 게 누구 덕인데? 너 같은 그림자는 영원히 내 이름 뒤에서 대필이나 하다 조용히 사라지는 게 가문의 질서야.”
태진의 비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일 아침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될 거다. ‘태율엔터 천재 프로듀서 강태진의 전속 대필 작곡가, 상습 마약 투약 후 음주운전으로 사망.’ 죽어서도 내 이름값이나 올려. 네가 그나마 쓸모 있을 때가 그때니까.”
“내가…… 널 가만둘 것 같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네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거다!”
“지옥에서 잘 살아봐라, 버러지 같은 놈.”
뚝. 전화가 끊겼다. 25톤 덤프트럭의 묵직한 쇠 범퍼가 경차의 후미를 무자비하게 짓뭉갰다.
콰아아앙—!
뼈가 바스러지는 끔찍한 둔탁음과 함께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차량이 세 바퀴를 구르며 강변 난간을 뚫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부서진 차창 틈으로 쏟아지는 차가운 빗물.
도준의 귓가에 지난 15년 동안 글로벌 메인 싱글 차트 TOP 100과 국내 연간 차트 1위를 휩쓸었던 수많은 멜로디와 화음, 비트의 파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이대로는 못 죽어…… 내 음악을 도둑질한 그 악마들을 내 손으로 찢어 죽이기 전까진 절대로……!’
“야, 강도준! 너 미쳤어? 연습실에서 처자고 지랄이야?!”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뒤통수로 묵직한 악보철이 날아와 꽂혔다.
퍽!
도준이 번쩍 눈을 떴다. 폐부를 찌르는 축축한 곰팡이 냄새, 방음 패드가 뜯겨 나간 좁아터진 지하 합판 벽, 그리고 고물 디지털 신시사이저. 코피를 쏟아내던 강변북로의 차가운 빗물은 온데간데없었다.
“……?”
도준이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범벅이던 손가락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웠고, 관절염으로 굳어 있던 손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연했다. 신시사이저 옆에 놓인 구형 스마트폰 화면에 푸른 불이 들어왔다.
[2011년 5월 16일 월요일 오후 3시 15분]
2011년. 스물한 살. 자신이 태율그룹 지하 연습실로 끌려와, 강태진이 총괄하는 신인 프로젝트의 타이틀곡을 빼앗기기 시작한 바로 그날이었다.
“멍청하게 넋 놓고 있지 말고 일어나, 이 새끼야! 태진 전무님이 오늘 저녁 임원 회의에 올릴 타이틀곡 가이드 내놓으라고 난리셔!”
도준의 앞에 서 있는 자는 훗날 강태진의 충견이 되어 온갖 비자금 세탁을 도맡았던 태율엔터의 서 팀장이었다. 도준은 서 팀장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지난 생에는 저 목소리만 들어도 몸이 굳었다.
도준은 그 사실을 곧장 기뻐하지 못했다.
살았다는 안도보다 먼저 떠오른 건, 병원비 봉투를 쥔 채 웃던 어머니의 손이었다. 지난 생의 마지막까지 그는 그 손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버리지 못했다. 곡을 빼앗긴 것보다 더 오래 남은 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믿어준 사람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는 감각이었다.
도준은 손바닥을 천천히 폈다. 스물한 살의 손에는 굳은살도, 오래된 흉터도 없었다. 아직 잃기 전의 손이었다.
‘이번엔 빼앗기지 않는다.’
곡도, 이름도, 사람도.
복수는 그다음이었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까지 대신 값을 치르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살아 돌아왔다.’
시간만 되감긴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2011년부터 2026년까지 자신이 듣고 분석했던 히트곡의 코드 진행과 편곡 데이터, 차트 흐름이 악보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서 팀장.”
회귀한 날로부터 정확히 15년이 지난 2026년 5월 16일, 화창한 봄날.서울 마포구 한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제니스톤 글로벌 본사 최상층. 유리 녹음실과 옥상 테라스가 한쪽 문으로 이어진 공간이었다.따사로운 햇살 아래, 도준과 시아, 루미나, 그리고 블루 스카이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향긋한 커피와 신선한 과일 타르트가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도준이 15년 전 지하 골방에서부터 아끼던 낡은 디지털 신시사이저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창밖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한강 물결이 봄 햇살을 받아 황금빛 보석처럼 눈부시게 반짝였다.“대표님! 이번 월드 스타디움 투어 50개 도시가 예매 시작 1분 만에 전석 매진됐습니다!”민성훈 대표가 상기된 얼굴로 태블릿 PC를 들고 테라스로 뛰어 들어왔다.루미나의 유진이 가장 먼저 소리를 질렀고, 멤버들은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쳤다. 한동우는 오래 쓴 기타 피크를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굴렸다.“첫 도시는 서울로 잡아주세요. 우리 시작한 데부터 가고 싶어요.”유진이 말하자 한동우도 웃으며 거들었다.“홍대 버스킹 자리도 하루 비워두죠. 표 없어도 들을 수 있게 한 곡은 해야지.”민성훈은 바로 투어 일정표에 두 항목을 적었다. 오래 함께한 팀은 기뻐하는 방식도 저마다 달랐다.시아가 도준의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왼손 약지의 얇은 반지가 햇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 도준의 손에도 같은 반지가 있었다.시아는 예전처럼 말을 꺼내기 전에 입술을 한 번 다물었지만, 이제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도준 씨, 기억나요? 15년 전 지하 비상구 계단에서 울고 있던 저한테 미지근한 물병 건네주셨던 날이요.”
“고마워.”“떨었죠?”“무대 올라갈 때는 안 떨었는데.”“그럼 언제요?”도준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웃었다.“내려오니까 네가 안 보일까 봐.”시아가 품에서 조금 떨어져 그를 올려다봤다.“그건 너무 반칙인데.”“뭐가.”“상 받고 나서 갑자기 말 잘하는 거.”도준이 트로피를 한 손으로 옮겨 들고 다른 손으로 시아의 손을 잡았다.“내일 서울 가면 뭐 하고 싶어?”“진짜 물어보는 거예요?”“응. 이제 그런 거 하기로 했잖아.”시아가 잠깐 고민했다.“편의점 라면.”도준이 웃음을 터뜨렸다.“세계 시상식 끝나고 첫 데이트가 편의점?”“싫어요?”“아니. 좋아.”***그날 밤 두 사람은 공식 애프터파티에 30분만 얼굴을 비춘 뒤 호텔 근처 24시간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샀다. 수백 개의 플래시보다 서로 마주 앉은 작은 테이블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월드 레코딩 어워즈의 역사적인 수상 이후, 대한민국과 전 세계 대중음악 시장의 판도는 완전히 재편되었다.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돌아온 강도준과 제니스톤 글로벌은 북미와 유럽 시장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수도권 국제공항 입국장에는 팬들과 취재진이 몰렸고, 도준이 한국어로 밝힌 수상 소감이 하루 종일 뉴스에 반복됐다.그해 말 정부는 도준
도준은 대답하기 전에 손등으로 시아의 손가락을 아주 살짝 건드렸다. 레드카펫 위에서는 카메라가 사방을 향하고 있어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두 달 전부터 둘만 아는 연애를 시작했지만,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다.시아가 눈을 흘겼다.“카메라 없을 때는 잘 잡더니.”“지금 잡으면 내일 기사 제목이 음악이 아니잖아.”“마에스트로가 생각보다 겁이 많네요.”“너 관련 기사에는 좀.”시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상을 받으면 끝내려고.”“못 받아도요?”도준은 잠시 레드카펫 끝의 카메라를 봤다.“오늘 무대까지 끝나면. 이제 내 사람들까지 그림자 뒤에 둘 이유가 없어.”시아는 더 묻지 않고 그의 걸음에 맞췄다.***시상식 2부의 시작을 알리는 스페셜 오프닝 무대.웅장한 오케스트라 튜닝 소리가 잦아들고, 메인 전광판에 ‘ZENITONE GLOBAL’의 시그니처 황금빛 엠블럼이 떠올랐다.지이잉—.도준의 피아노를 시작으로 시아의 《새벽 세 시의 멜로디》, 루미나의 《Electric Queen》, 블루 스카이의 《흔적》이 100인조 세션 오케스트라와 이어지는 심포닉 팝 메들리로 펼쳐졌다.영어 가사를 억지로 덧씌우지 않은 한국어 원곡과 라이브 보컬이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무대가 끝나자 객석의 세계적인 가수와 프로듀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박수는 다음 순서 안내가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프로듀서상 시상 순서가 돌아왔다.시상자가 봉투를 열고 정식 부문명을 읽었다.“Producer
시아가 먼저 말했지만 도준은 후보 통지서보다 무대 밖에서 정리 중인 어머니의 악보를 바라봤다.“오늘은 어머니 공연이야. 이건 내일부터 기뻐하자.”민성훈이 웃으며 문서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셋은 마지막 관객이 언덕을 내려갈 때까지 대기실을 떠나지 않았다.자정이 가까워진 뒤 마지막 스태프 차량까지 내려갔다.도준은 빈 객석을 한 번 돌아보고 무대 뒤편의 옛집 터로 걸어갔다. 시아가 몇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도준 씨.”“응.”“공연 끝나고 대답한다면서요.”도준이 걸음을 멈췄다.시아가 먼저 말해놓고도 긴장했는지 손가락으로 드레스 옆선을 만지작거렸다.“제가 알아맞히라고 했던 거.”도준은 한참 그녀를 바라봤다.복수를 시작했을 때 자신의 미래에는 태율가의 몰락만 있었다. 그 뒤는 새하얀 빈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빈칸을 생각하면 지하 작업실의 불빛, 녹음 부스의 목소리, 밥을 먹었냐고 묻는 메시지가 먼저 떠올랐다.전부 윤시아였다.“복수 끝난 다음을 모르겠다고 했지.”“네.”“이제 조금 알 것 같아.”도준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네가 있는 쪽으로 가고 싶어.”시아가 숨을 멈췄다.도준은 더 꾸미지 않았다. 음악처럼 멋있는 문장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정확한 말이 필요했다.“프로듀서로서가 아니라, 강도준으로.”시아의 눈가가 천천히 휘었다.“그 말…… 가수가 프로듀서한테 듣는 말 아니죠
2011년 12월 1일 밤, 서울 마포구 상수동 언덕길.15년 전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쫓겨났던 단칸방 터와 옆 공터에는 반원형 임시 무대가 세워져 있었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담장은 그대로 남겨 두고, 이름만 ‘은혜의 숲’이라 붙였다.무대 둘레에는 안전등이 든 유리 랜턴과 백합이 놓였다.초겨울의 맑은 하늘 아래, 전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유력 음악 관계자들과 수천 명의 음악 팬들이 질서정연하게 언덕 위 객석을 가득 채웠다.언덕 아래에서도 유리 랜턴의 불빛이 무대까지 이어져 보였다.엄숙한 적막이 감도는 반원형 임시 무대 중앙, 순백의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 앞에 강도준이 단정하게 앉았다.블랙 턱시도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의 단단한 어깨 위로 따스한 핀 조명이 떨어졌다.도준이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첫 타건을 시작했다.도롱, 도로롱—.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한강변의 찬 초겨울 바람을 타고 언덕 아래로 퍼져나갔다.도준은 어머니가 처음 가르쳐 준 네 마디를 전주에 그대로 남겼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음들이 찬 공기 속에서 길게 울렸다.무대 뒤편에서 순백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윤시아가 마이크를 쥐고 걸어 나왔다.시아의 눈동자는 맑은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시아의 손은 차가웠다. 도준은 건반에서 한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들었다.“손 이리 줘.”시아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자 도준은 주머니에서 작은 손난로를 꺼내 그녀의 손바닥에 쥐여줬다.“목만 챙기지 말고 손도 챙겨.”“도준 씨 손은요?”“난 건반 치면 따뜻해져.”시아가 손난로를 반으로 감싸 쥔 뒤 그중 한
홍대 제니스톤 글로벌 본사 메인 레코딩 스튜디오.도준은 믹싱 콘솔 앞에 앉아 어머니의 유작 중 가장 애절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인 《바람이 머무는 언덕》의 편곡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두꺼운 방음 유리창 너머 녹음 부스 안에는 윤시아가 악보를 가슴에 꼭 품은 채 눈을 감고 감정을 잡고 있었다.그녀의 긴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이 조명 아래서 투명하게 반짝였다.“시아야, 준비됐니?”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도준의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시아가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부를게요. 한 음도 함부로 넘기지 않을게요.”시아는 악보 여백에 적힌 서은혜의 숨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전날부터 같은 첫 소절을 반복한 흔적이 연필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자기 기교를 보이기보다 원곡의 호흡을 먼저 익히려 한 것이다.도준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부탁한다.”반주가 시작되었다.도준이 직접 연주한 서정적인 어쿠스틱 피아노와 웅장한 첼로 선율 위로, 윤시아의 깊고 맑은 보컬이 공기를 갈랐다.녹음실 유리창 너머로 노래를 듣던 엔지니어들과 민성훈 대표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첫 테이크가 끝났지만 도준은 바로 인터폰을 누르지 못했다. 손가락이 콘솔 위에 멈춰 있었다.부스 안의 시아가 헤드폰 한쪽을 벗었다.“도준 씨?”“……한 번만 더 가자.”“어디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도준은 잠시 생각했다. 기술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아니.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엔지니어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민